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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내 삶의 이유/And more,,'에 해당되는 글 93

  1. 2012.03.23 구두닦이 목사님
  2. 2012.03.14 삶은..
  3. 2012.02.17 티보잉
  4. 2011.05.27 꽃과 같은 크리스찬
  5. 2011.04.20 자기의 내려놓기 - <더 내려놓음> 중
  6. 2011.04.19 나무와 개미
  7. 2011.04.04 애통함
  8. 2011.03.20 '불구하고'의 예배
  9. 2011.03.20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 Accept Trials
  10. 2011.02.15 나의 자아와 나의 노력을 포기하라

구두닦이 목사님

2012. 3. 23. 01:17 | Posted by a passing b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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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2012. 3. 14. 23:08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하나님의 필연이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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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잉

2012. 2. 17. 00:26 | Posted by a passing b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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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같은 크리스찬

2011. 5. 27. 01:02 | Posted by a passing breeze
Christians are like the several flowers in a garden that have each of them the dew of Heaven, which, being shaken with the wind, they let fall at each other's roots, whereby they are jointly nourished, and become nourishers of each other. 
- John Bunyan

꽃과 같은 크리스찬...
각자 천국의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기도하며,
또 꽃잎이 떨어져 서로의 뿌리에 영양분이 되기도 하는
꽃과 같은 크리스찬!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잘못된 보호본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서로에게 꽃과 같은 크리스찬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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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지혜를 '분별하는 마음(discerning heart)'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심정을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찾아와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었다. 그때 솔로몬은 산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이의 진짜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이것이 분별하는 마음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과 고소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함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말이다. 그래서 판단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말로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한다면 그 안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교만이 존재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셨다. 나의 나 되기까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오래 참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는 대상의 현재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신다. 나는 그의 미래의 변화된 모습을 알지 못한다. 또 나의 미래의 모습도 알지 못한다. 변화되지 못했던 나의 예전 모습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자라 보여도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내다보며 기대를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의 지혜이다.

- 이용규 <더 내려놓음>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너무나도 자주 '판단'의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 

너무나도 자주 '판단'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판단'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판단을 많이 할까'하며 나도 동일한 올무에 걸려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종종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한 입술을 통해 불평, 혹은 말다툼 이라는 썪은 열매로, 심한 경우 관계의 깨어짐이라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그러나 마음의 불편함 이상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영적 전쟁의 부분이다. 우리가 이렇게 육체로 싸우며 진을 빼는 동안, 사단은 이를 보며 기뻐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차츰차츰 우리의 영혼을 상처내고 무너뜨리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작은 일에 시선을 빼앗겨 아둥바둥하는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눈을 떠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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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개미

2011. 4. 19. 02:19 | Posted by a passing breeze



400년간 14번의 벼락과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이겨내고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개미떼로 인해 쓰러진 나무처럼,

종종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살아가면서

큰 위기나 환난의 때에는 말씀과 성령에 의지하여 잘 극복하면서도

의외로 일상속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채 오랜세월 쌓이고 쌓여 큰 나무가 쓰러지듯 어처구니없이 쓰러져 버릴 때가 있다.



작은 상처, 작은 의심, 작은 원망, 작은 불신앙, 작은 쓴뿌리, 작은 불평, 작은 염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영혼의 나무를 개미떼처럼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지 않은 채

큰 역경을 이겨내는 것만으로 내 영혼이 잘 되고 있다라고 용단하고 있다면,

큰 일들을 이루어내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우리 영혼을 돌아보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단은 어쩜 우리가 큰 일을 성공하는 것, 멋진 사역의 열매들을 맺는 것보다,

한 영혼을 조금씩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게 좀먹고 결국엔 쓰러뜨리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영적전쟁이 어떠한 것인지 영적인 눈을 떠야만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벧전 5: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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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함

2011. 4. 4. 10:22 | Posted by a passing breeze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애통함을 통해서 
그의 뜻을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면
애통함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 오스왈드 챔버스

If through a broken heart God can bring 
His purposes to pass in the world, 
then thank Him for breaking your heart.
 – Oswald Chambers


그 분의 도구가 된다는 것,

그 분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과 빛과 뜻을 세상에 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에 있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해받을만하고, 언제나 환영받을만하고, 

언제나 그럴듯 해보이는 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애통함, 비천함, 낮아짐, 깨어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며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나온 모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광야에서 양치던 모세, 애굽에서 노예로 죄수로 지내던 요셉, 사울에게 쫓기던 비참한 다윗의 삶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


어릴 땐 고난이라는 게, 겉으로도 무언가 폼나 보이는, 

사람들이 볼 때도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으로 오는 줄로만 착각했었다. 


예를들면, 바울처럼 세 번 간구해도 거두어가지 않으시는 가시가 있다던지, 

다윗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미친 왕 사울에게 쫓겨다닌다던지.. 

내가 아픔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무언가 명분이 서는 그런 고난만이 고난의 전부인줄 알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더 깊은 고난은 

나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지독한 고독과 한 셋트임을 깨닫게 된다. 

이게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차원의 것이 보일테지.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사실은 

내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살아갈 때에 온전한 그 분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리라...

'불구하고'의 예배

2011. 3. 20. 11:55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욥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예배했습니다.

욥은 예배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상황이 불가능할수록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더 크게 이루십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로다.’(NIV 직역 욥기 13:15)

-찰스 스윈돌과 함께하는 365일 ‘지혜’ 중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 또 의지를 넘어선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 정, 의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또 언제라도 변질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을 주셨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영'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찬양하고 영으로 기도한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드린 욥의 예배가 아마 그런 영적인 예배가 아니였을까.

그랬기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을 상황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하나님.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부요해도 가난해도, 높은 곳에 있어도 낮은 곳에 처해도, 평화시대에 살아도 전쟁중에 살아도, 그러한 외적인 요소들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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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고통이 너를 온통 제압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 내 뜻을 이루는 것 이상의 일을 네게 하지 못하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내 뜻이 너의 뜻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너를 망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느냐? 네 앞에 새로운 삶을 펼쳐놓았노라.
너는 그저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되느니라.

내 임재의 빛을 네 길에 비출 것이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
내가 네게 모든 필요를 채우고도 남을 은혜를 베풀 것이니라.

- <하나님 음성> 두 명의 경청자


'내 뜻이 너의 뜻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뜻이 나의 뜻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른다해도 오직 당신의 길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라고 얼마나 많이 고백했던가!

그럼에도 다시 넘어지고 주저앉고 때론 일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연약함과 
내 고백을 번복하고 싶은 완악함이 우리 인생의 본질임을 그 분은 너무도 잘 아셨기에, 
우리에게 한 길, 십자가의 길을 친히 열어주셨다.
십자가의 길은 무한한 용서의 길임과 동시에
그 용서를 위해 치르신 희생을 닮아가는 길이요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길이며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길이다.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내 힘이 아니라 그 분의 힘이기에,
내 능력이 아니라 그 분의 능력이기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분이 사시기에,
오늘도 담대히 그 분만을 의지해 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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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장악하시면,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곧 아들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변화시키신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거나 그분을 본받거나 그분의 삶을 모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사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모범을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의무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사시도록 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삶은 너무나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모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사실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아와 자기 자신의 노력을 포기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이유는, 우리의 내적 생명을 소유하시어 새롭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그러한 사역을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행하신다. 주님이 그토록 놀라운 사역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말라.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갈보리의 그리스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셔. 주님이 내 안에서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실 거야!”라고 확신하라.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기뻐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 앤드류 머레이 <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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