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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해당되는 글 36

  1. 2011.04.20 자기의 내려놓기 - <더 내려놓음> 중
  2. 2011.04.15 made whole
  3. 2011.04.04 애통함
  4. 2011.03.20 '불구하고'의 예배
  5. 2011.01.26 나의 주관자
  6. 2011.01.11 하나님만이..
  7. 2011.01.0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
  8. 2010.12.07 how can God judge us?
  9. 2010.11.20 하나님과 함께라면
  10. 2010.11.12 walk or stop


하나님께서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지혜를 '분별하는 마음(discerning heart)'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심정을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찾아와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었다. 그때 솔로몬은 산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이의 진짜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이것이 분별하는 마음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과 고소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함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말이다. 그래서 판단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말로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한다면 그 안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교만이 존재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셨다. 나의 나 되기까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오래 참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는 대상의 현재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신다. 나는 그의 미래의 변화된 모습을 알지 못한다. 또 나의 미래의 모습도 알지 못한다. 변화되지 못했던 나의 예전 모습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자라 보여도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내다보며 기대를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의 지혜이다.

- 이용규 <더 내려놓음>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너무나도 자주 '판단'의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 

너무나도 자주 '판단'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판단'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판단을 많이 할까'하며 나도 동일한 올무에 걸려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종종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한 입술을 통해 불평, 혹은 말다툼 이라는 썪은 열매로, 심한 경우 관계의 깨어짐이라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그러나 마음의 불편함 이상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영적 전쟁의 부분이다. 우리가 이렇게 육체로 싸우며 진을 빼는 동안, 사단은 이를 보며 기뻐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차츰차츰 우리의 영혼을 상처내고 무너뜨리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작은 일에 시선을 빼앗겨 아둥바둥하는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눈을 떠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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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whole

2011. 4. 15. 21:33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 37: 7)


에스겔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환상 속에서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 섰다. 그 골짜기는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마른" 메말라 죽은 골짜기였으리라. 그러나 이 말라비틀어진 뼈들이 가득한, 흉측하고 소망없어 보이는 죽음에 가까운, 아니 죽음의 경계를 이미 넘어와 버린 듯한 이 골짜기에서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물어보신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길지도 않은 인생 중에 만나는 여러가지 시련, 고난, 어려움, 질병, 관계의 단절... 우리들 인생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에스겔이 본 죽음의 골짜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너무나 오래된 갈등의 문제로 곪아터지다 못해 굳은 딱지가 앉아버려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관계의 문제들,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환경의 문제로 궁지에 몰려 도무지 회생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문제들, 오랜 시간 시달려온 병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몸과 마음들, 맑은 샘물처럼 샘솟던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고 근원이 마른 샘물 같아져 버린 영혼들...


이 모든 것을 보시며, 이 모든 죽은 것들을 보시며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사람의 눈으로는, 이성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가? 도우시려면 진작에 도우시지 다 끝난 이 마당에 개입하시느냐고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있는가?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모를까 이젠 다 틀렸다, 너무 늦었다라고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 하나님의 이 질문에 당신도 응답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이 확신에 찬 긍정의 대답을 한 것인지, 자신이 없어 하나님만 아시죠라고 대답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적어도 이 메마른 뼈 골짜기에도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대언하여 명하라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 그리고 그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마른 뼈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들어맞아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여 이제는 사람의 모양을 되찾았다. 


우리가 처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문제들...

그 문제의 해결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아예 포기하고 주저앉아 정말 죽은 뼈, 마른 뼈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죽은 지 아주 오래된 뼈들이 제 자리를 찾아 들어 맞아서 서로 연락하듯이, 우리가 처한 문제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원래의 자리를 찾아 그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회복된 형상은 사람의 힘으로 엇비슷하게, 혹은 모양새 그럴듯하게 끼워맞춘 뼈 모양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그 형상 그대로 회복된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회복된 형상에 다시 대언케 하신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형상만 회복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 그 안에 생기를 넣어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신다. 

그 생명을 얻어 일어난 이 무리- 이 무리는 전에 심히 마른 뼈라 불리던 무리임을 기억하는가-는 "극히 큰 군대"로 섰다.

원래의 형상을 회복할 뿐 아니라 생기를 얻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르심의 자리에까지 서게 된 것이다.


당신의 삶이 끝장난 것 같은가? 

관계가 다 끝난 것 같은가?

더이상은 어떤 소망도 붙들 수가 없는가?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든, 당신이 지금 죽음의 골짜기에 있다면 '아주 마른 뼈'들을 온전하고 새롭게 만드셔서 "극히 큰 군대"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함으로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약속을 의지하자. 그 때 우리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겔 37: 14)


애통함

2011. 4. 4. 10:22 | Posted by a passing breeze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애통함을 통해서 
그의 뜻을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면
애통함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 오스왈드 챔버스

If through a broken heart God can bring 
His purposes to pass in the world, 
then thank Him for breaking your heart.
 – Oswald Chambers


그 분의 도구가 된다는 것,

그 분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과 빛과 뜻을 세상에 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에 있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해받을만하고, 언제나 환영받을만하고, 

언제나 그럴듯 해보이는 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애통함, 비천함, 낮아짐, 깨어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며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나온 모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광야에서 양치던 모세, 애굽에서 노예로 죄수로 지내던 요셉, 사울에게 쫓기던 비참한 다윗의 삶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


어릴 땐 고난이라는 게, 겉으로도 무언가 폼나 보이는, 

사람들이 볼 때도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으로 오는 줄로만 착각했었다. 


예를들면, 바울처럼 세 번 간구해도 거두어가지 않으시는 가시가 있다던지, 

다윗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미친 왕 사울에게 쫓겨다닌다던지.. 

내가 아픔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무언가 명분이 서는 그런 고난만이 고난의 전부인줄 알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더 깊은 고난은 

나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지독한 고독과 한 셋트임을 깨닫게 된다. 

이게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차원의 것이 보일테지.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사실은 

내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살아갈 때에 온전한 그 분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리라...

'불구하고'의 예배

2011. 3. 20. 11:55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욥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예배했습니다.

욥은 예배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상황이 불가능할수록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더 크게 이루십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로다.’(NIV 직역 욥기 13:15)

-찰스 스윈돌과 함께하는 365일 ‘지혜’ 중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 또 의지를 넘어선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 정, 의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또 언제라도 변질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을 주셨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영'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찬양하고 영으로 기도한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드린 욥의 예배가 아마 그런 영적인 예배가 아니였을까.

그랬기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을 상황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하나님.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부요해도 가난해도, 높은 곳에 있어도 낮은 곳에 처해도, 평화시대에 살아도 전쟁중에 살아도, 그러한 외적인 요소들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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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관자

2011. 1. 26. 11:23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우리의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자.
예수님의 발치에까지 가지고 나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 나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구나.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는 이유는 네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단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니 줄 수 없는 거란다."

우리 안에 혹시 하나님조차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는가?
이 영역안으로 주님을 초청하라.
주님이 내 의식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셔서 나의 주관자가 되어주셔야 한다.

- 이용규 <더 내려놓음> 중에서

하나님만이..

2011. 1. 11. 23:43 | Posted by a passing breeze

"Anyone can count the seeds in an apple,
 but only God can count the number of apples in a seed."

- Robert H. Schuller

누구나 사과안에 있는 씨를 셀 수는 있지만, 그 씨앗 안에 몇개의 사과가 들어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분명, 똑같이 생긴 씨앗이지만, 그 씨앗이 맺는 열매의 모습과 풍성함은 다르다.
그리고, 그 씨앗 안에 담긴 생명력과 가능성은 우리 눈으로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실제로 심어보고, 정성껏 길러봐야 -모..더러는 야생에서 혼자 자라기도 한다지만- 얼마나 큰 나무가 되는지,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내 삶에 있어서 그 씨앗을 심어보기도 전에, 키워보기도 전에, 씨앗에 담긴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들과,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여러가지 선택들 앞에서, 과연 난 하나님의 눈으로 그 씨앗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씨앗을 앞에 놓고, 그 가능성과 기대와 풍성함을 씨앗의 크기만큼이나 작은 내 마음 안에 가둬버리진 않는지...
믿음의 눈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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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2. 08:30 | Posted by a passing breez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 25)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정신과 이성이 신령한 지식을 추구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주된 관심은 정신과 정신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과 마음의 성향입니다. 무지함, 무력함, 의지함, 온유함, 온순함, 신뢰함, 그리고 사랑, 이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려는 사람들 속에서 찾으시는 태도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항상 하늘 아버지께서 그 진리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밝히 드러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지어는 갓난아이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사랑의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머리 속의 지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다 이해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지식의 영적 의미를 그들에게 감추십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마음과 감정, 즉 겸손, 사랑, 그리고 신뢰의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 사실을 그들의 마음과 경험 속에 계시하십니다.

 

- 앤드류 머레이 <골방에서 만나는 하나님> 중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의 거만한 심령이 아닌,

무력하고 무지하고 온순한 어린아이의 심령으로 말씀 앞에 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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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can God judge us?

2010. 12. 7. 13:11 | Posted by a passing breeze

At the end of the time, billions of people were scattered on a great plain before God's throne.  Some of the groups near the front talked heatedly, not cringing with shame but with belligerence.

 

"How can God judge us?  How can He know about suffering?"  snapped a joking brunette.  She jerked back a sleeve to reveal a tattooed number from a Nazi concentration camp.  "We endured terror, beatings, torture, death."

 

In another group, a black man lowered his collar, "What about this?" he demanded, showing an ugly rope burn. "Lynched for no crime but being black!  We've suffocated in slave ships, been wrenched from loved ones, toiled till only death gave relief."

 

Far out across the plain were hundreds of such groups.  Each one had a complaint against God for the evil and suffering being permitted in this world.

 

How lucky God was to live in Heaven, where all was sweetness and light, where there was no weeping, no fear, no hunger, no hatred.  Indeed, what did God know about what man had been forced to endure in this world?  "After all, God leads a pretty sheltered life," they said.

 

So each group sent out a leader, chosen because he had suffered the most.  There was a Jew, a black, an untouchable from India, an illegitimate, a person from Hiroshima and one from a Siberian slave camp.  In the center of the plain, they consulted with each other.  At last, they were ready to present their case.

 

It was rather simple:  Before God would be qualified to be their judge, He must endure what they had endured.  Their decision was that God should be sentenced to live on earth as a man.

 

But because He was God, they set certain safeguards to be sure He could not use His divine powers to help Himself:

 

Let Him be born a Jew.

 

Let the legitimacy of His birth be doubted so that none will know who is really His father.

 

Let Him champion a cause so just but so radical that it brought down upon Him the hate, condemnation and eliminating efforts of every major traditional and established religious authority.

 

Let Him try to describe what no man has ever seen, tasted, heard or smelled.  Let Him try to communicate God to men.

 

Let Him be betrayed by His dearest friends.  Let Him be indicted on false charges and tried before a prejudiced jury and convicted by a cowardly judge.

 

Let Him see what it is to be terribly alone, completely abandoned by every living thing.  Let Him be tortured, and let Him die the most humiliating death with common thieves.

 

As each leader announced his portion of the sentence, loud murmurs of approval went up from the great throng of people.

 

When the last had finished pronouncing sentence, there was a long silence.  No one uttered another word.  No one moved.  For suddenly, all knew -- God had already served His sentence.

 

Reprinted from "Right On," by Christian Liberation

<Winning God's Way> Loren Cunning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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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라면

2010. 11. 20. 13:51 | Posted by a passing breeze

2002년 여름 몽골에 정탐 여행을 가기 직전, 나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호피 부족에게로 단기선교를 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30개월 된 동연이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처가댁에 아이를 맡기고는 몽골로 먼저 들어갔다. 일주일 후 내가 단기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가서 동연이를 만났을 때, 아이는 내게 울며 매달렸다.

 

"엄마가 나한테 '빠이빠이'하고 혼자 갔어."

 

동연이는 이 말을 되풀이 했다.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아이는 그 후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호주에서 나오는 여행 전문 서적인 Lonely Planet Series의 몽골편을 골라 들었는데 표지에 사막 사진이 있었다. 동연이에게 물었다.

 

"동연아 너 여기 가고 싶니?"

"아니."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가 지금 여기 가 있는데도?"

"그럼 갈래요. 거기 좋아."

 

동연이에게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사막인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엄마와 함께라면 어떤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 [내려놓음] 이용규 선교사님-

 

아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 고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내가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숨 쉴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엄마와 함께라면 어떤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듯이,

내 남은 삶도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기 원하시는 곳에서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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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or stop

2010. 11. 12. 13:08 | Posted by a passing breeze

 

고장난 신호등처럼,

인생을 살면서 가끔 내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며

걸어야하는지 멈춰서야하는지,

나를 꺾어야 하는지 타협해선 안되는지,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정면돌파해야하는지 돌아가야하는지,

함께 나눠야 하는지 고독해야하는지,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시기엔 더욱 그렇다.

가끔은 숨이 막힐 듯이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인 듯 느껴질 때라도,

그 분은 여전히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기억한다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시간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역사의 한 절임을 알며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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